성경대학 자료실
신사도운동의 "기름부음"을 전하는 손기철 장로
기름부음이란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의 가장 관심이 되는 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것이다. 이 신비적인 개념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교회 속으로 유입되고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성경적 검증이 없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많은 성도들이 기름부으심을 사모한다. 목회자들도 자신의 사역에서 기름부음이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정작 기름부으심이 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른다. 한국에서 기름부음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온누리 교회의 손기철 장로이다. 손기철 장로는 <기름부으심>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널리 읽혀지게 하였다. 기름부음의 전도사가 된 손 장로는 어디에서 기름부음에 대해서 배웠을까? 손 장로의 기름부음에 대한 이론은 그의 <기름부으심>이라는 책과 또 다른 책 <고맙습니다 성령님>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손 장로의 기름부음 사상은 어디에서 연유하였을까? 손 장로의 기름부음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내용이 신사도운동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름부음에 대한 손 장로의 중심적인 주장을 요약하고, 동시에 그 내용이 어떻게 신사도운동과 관련되었지 설명하면서 손 장로의 사상이 결국 신사도운동에서 그 뿌리가 시작되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손 장로의 주장 1, “기름부음은 성령세례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손 장로의 글을 읽으면 기름부음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고, 또한 성령세례 이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름부으심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기름부으심은 성령세례를 받은 하나님나라의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기름부으심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손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령 세례를 받으셨다고 한다. 요한에게서 물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실 때에 성령 세례가 임하였고 이어서 기름부으심까지 받으셨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강림하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라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렸던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온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표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 공생애가 시작됨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세레머니였다. 신학자들이 이 장면을 예수의 메시야 대관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장면을 예수에게 능력이 임하는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그 예수께서 기름부으심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기름부음을 신비적으로 기술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우를 범하였다 여겨진다.
성령세례는 신사도운동의 핵심 요소이다
우리는 왜 기름부으심에 대해서 설파하는 손 장로가 성령세례를 이처럼 강조하는지 그 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가 말하는 성령세례는 신사도운동의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신사도운동은 쉽게 말해 성령세례 운동이다. 성령세례가 임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모습으로 성령의 권능(?)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 현상을 성령의 기름부으심(anointing)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신사도운동은 성령세례 운동이며, 동시에 기름부음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신사도운동의 신학적 뼈대를 수립한 사람은 풀러신학교의 교수였던 Peter Wagner이다. 그는 빈야드운동을 경험하면서 신앙의 급격한 노선변경을 경험하였다. 피터 와그너는 빈야드운동의 창시자 John Wimber와 깊은 교분을 나누면서 그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이적들을 보게 된다. 당시 존 위버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우려스러운 현상들, 즉 쓰러짐, 낄낄거림, 짐승소리, 기괴한 방언,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현상 등을 비성경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한국의 주요 교단들은 소속 교회들을 경계하게 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인 예장 통합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빈야드운동은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이해가 치우쳐 있고, 거룩한 웃음, 떨림, 쓰러짐, 짐승소리 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그들의 성경 해석은 올바르지 않으며 또한 무질서한 예배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므로 본 교단 소속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빈야드 형식의 예배를 무분별하게 도입하여 들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삼가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는 그런 현상들이 새로운 성령세례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성령의 제3의 물결”(The Third Wave of Holy Spirit)이라는 이론을 발표하였다. 쉽게 말해서 성령세례의 세 번째 물결(흐름)이 일어났다는 것인데, 첫 번째 물결은 1900년대 초 아주사 부흥을 기점으로 “성령세례 = 방언”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두 번째 물결은 1960년 캘리포니아의 성공회 교회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때에도 여전히 “성령세례 = 방언”이라는 것이 그 물결의 중심에 있었다. 세 번째 물결은 1980년대부터 일어났는데, 이때부터는 성령세례가 달라졌다고 한다. “성령세례 = 방언”이라는 패턴이 깨어지고 대신 “성령세례 = 이적, 치유, 신약성경의 모든 현상”이라는 새로운 모양의 성령세례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제3의 물결이다.
피터 와그너가 낄낄거리고, 짐승소리를 내고, 드러누워 구르고, 쓰러지고, 기괴한 방언을 흥얼거리고, 술취한 듯 혀가 꼬부라지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현상 등이 새로이 등장하는 성령세례의 현상이라고 명확하게 말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사도운동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괴이한 현상들이 새로이 나타나는 성령세례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피터 와그너 자신이 한 번도 그러한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피터 와그너 역시 그들의 기괴한 행동이 새로운 성령세례라고 이해하였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점에 대해서는 다른 신사도운동가의 말을 참고하고자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사도운동 신학자인 예영수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3의 물결이 일어난 것은 John Wimber목사의 빈야드(Vineyard)교회였으며,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물결은 ‘토론토 브레싱(Toronto Blessing)’으로 알려진 존 아놋(John Arnot) 목사의 토론토공항교회로 이어졌으며, 이 물결은 플로리다 펜사콜라 브라운스빌교회로 연결된다.”
존 윔버의 집회에서 일어난 중심적인 일들, 존 아놋의 토론토공항교회에서 일어난 일들, 그리고 플로리다 펜사콜라의 브라운스빌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이 모두 유사했다. 기괴한 방언, 술 취한 듯 비틀거림, 쓰러짐, 짐승 같은 행동 등의 현상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장소는 각각 달랐지만, 그 특징이 일치하였음으로 교회사에는 “빈야드 부흥”, “웃음부흥”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신사도운동신학자인 예영수 박사는 이 모두를 제3의 물결 시대의 부흥이라고 한다. 모두 피터 와그너가 주창한 세 번째 성령세례의 물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종류의 집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촬영한 실제 영상을 보도록 하자. 다음의 영상은 신사도운동가 Kenneth E Hagin의 집회의 실제 영상이다. 그가 이상한 영에 포로 되어 술 취한 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걸으면서 연신 낄낄거리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집회를 인도하면서 그가 가는 곳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정상적인 신앙 상식과 이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런 모습을 볼 때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 없이 용인할 뿐 아니라 환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성령세례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 3의 물결 시대의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세례과 신사도운동의 성령세례의 차이는 방언
신사도운동가들이 믿는 성령세례는 기존의 오순절 교회의 성령세례와는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방언이다. 1906년부터 등장한 오순절 교회의 성령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언이었다. 성령세례의 보편적 증거가 방언이라고 믿는다. 보편적이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절대적이다.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이 성령세례 받았다고 인정하는 오순절 교회는 거의 없다. 그러나 80년대부터 나타난다는 신사도운동의 성령세례에서는 방언이 중요하지 않다. 방언 대신 다른 이적들과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이 제 3의 물결의 성령세례이다. 피터 와그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3의 물결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최종적 결과에 있지 않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병든 사람들이 고침받고, 절름발이가 걷고, 귀신이 추방되고, 그 밖의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능력들의 나타남(manifestations of the Holy Spirit)이 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에서 오랫동안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명확하게 다른 점은 성령세례의 의미와 성령세례를 확증하는 방언의 의미에 대하여 이해를 달리하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방언하지 못하는 자기 아내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기존의 오순절 교회 성도들이 방언으로만 성령세례에 접근하는 자세를 은근하게 질타하기도 했다.
손 장로는 제3의 물결의 성령세례를 가르친다. 놀라운 사실은 손기철 장로의 성령세례 사상이 피터 와그너의 제3의 물결 이론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름부으심이라는 이론을 한국 교회에 크게 확산시키는 손 장로의 사상의 뿌리가 신사도운동에 닿아있음을 증명한다. 실제로 한국 교회에는 성령이 이미 내주하는 신자에게 두 번째 성령의 임재(축복)으서 성령세례를 믿는 이들이 많다. 많은 경우 방언이 그 증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손 장로는 성령세례를 이야기하면서 방언에 대해서는 피터 와그너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손 장로는 성령세례를 말하지만 방언을 절대시 하지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으신 분들 가운데는 방언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방언은 모든 은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언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일부 교회에서는 ‘방언을 받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못 받은 것이다’라는 말까지 합니다. 방언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방언 받지 못했다고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를 믿어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두 번째로 성령이 임하고 그때 방언이 나타난다는 성령세례 이론은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게서 수용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인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 방언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빌립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서도 방언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9장의 아볼로가 먼저 개척한 에베소 교회에 바울이 방문하여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고 방언이 나타났다는 사례가 성령세례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주장된다. 그러나 아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 순교한 세례 요한에게서 신앙을 배운 사역자였다. 그가 에베소 교회를 먼저 개척했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온전한 복음을 전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바울이 도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안수)를 주었다. 그때 성령이 임하시고 유대인들 인근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에 나타나는 표적인 방언이 나타났던 것이다(고전 14:21,22). 이러한 내막을 알지 못하고 에베소교회처럼 성령없는 교회(성도)도 존재할 수 있다고 설교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라고 가르치는 목사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기존의 성령세례 사상도 복음주의 교회들이 용인하지 못하는데, 신사도운동은 여기에서 한참을 더 나아갔다. 방언 대신 쓰러지고 웃는 등의 각종의 괴이한 현상(귀신장난?)을 동반하는 기괴한 성령세례를 주장한다. 손 장로가 기름부음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성령세례의 내용이 바로 그것과 유사하다.
손 장로의 주장2, “기름부음으로 인하여 성령의 권능이 나타난다”
손 장로는 성령충만과 성령의 기름부음을 별도로 구별한다. 이미 예수 믿어 성령이 임하여 내주하시는 신자에게서 성령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이 나타남을 의미하는 용어가 성령충만이다. 손 장로는 성령충만과 기름부음을 구별하면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는 현상이 기름부음이라고 주장한다.
“성령충만과 기름부으심은 동일한 성령님의 나타나심이지만, 우리의 영육이 온전히 성령님께 사로잡혀서 그분을 통해 삶이 인도함을 받는 상태를 우리는 ‘성령충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거룩하게 구별되고 하나님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때의 상태를 ‘기름부으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과 기름부음을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손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그 이론을 적용하였다. 예수께서 지상의 공생애 동안 많은 권능을 행하신 것도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충만하셨고, 뒤이어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누가복음 4:18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결국, 예수께서는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후에 권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르치심에 권세가 있고,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선포하시고, 권능으로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신 것도 바로 기름부으심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이란 내주하시는 성령을 뜻한다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이 말하는 기름부음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기름부음은 구약 시대에 행해졌던 실제의 일이었다. 손 장로의 책을 보니 구약시대에 행해졌던 기름부음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설명하였다. 그러나 구약의 기름부음의 정신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고,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어떤 관점에서 기름부음이라는 단어를 활용하였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구약 시대에 행해졌던 기름부음의 의미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만 다음의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 특별하게 구별된다는 뜻이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자이니 그를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허물과 죄악이 많을지라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기를 두려워하였다(삼상 26:11). 또한 사울과 다윗이 각기 왕이 되기 이전에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것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기 위해 구별하였다는 의미였다.
둘째로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신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사명을 위해 구별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면 하나님의 신(성령)이 그에게 임하였다. 왕이 되도록 구별되어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가 예언하였다고 성경을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삼상 10:10). 또한 소년 다윗도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자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감동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니라”(삼상 16:13). 이처럼 기름부음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하여 구별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신의 임재하심이었다. 이와 같은 기름부음의 의미는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내주하심으로서 온전하게 성취되었다. 구약에서는 특정인들만 구별되어 기름부음 받았고, 그들에게만 성령이 임하였다. 그러나 십자가로 말미암아 신약에서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성령이 임하여 구별하여 인치신다고 말씀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그리고 성령은 성도에게 하나님을 섬기며 사명을 감당하도록 성령의 은사를 공급하신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 7-11). 성령께서 인치시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역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모든 은사와 능력을 공급하시니 구약의 기름부음 예식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굳이 구약의 기름부음이라는 개념을 애써 사용할 필요가 없다. “내주하시는 성령”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 말이 구약의 기름부음의 개념을 완성하고 대체하기에 가장 좋은 신약의 용어이다.
기름부음은 내주하여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성령을 뜻한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기름부음이라는 단어를 그러한 뜻으로 활용하였다. 신약 성경에서 기름부음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등장하는지 보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사도 요한은 복음의 진리를 변질시켜 영혼들을 미혹하는 초대 교회의 이단들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면서 기름부음이라는 구약의 개념을 동원했다. 참 성도는 기름부음을 받았으므로 진리를 깨달아 앎으로 마귀의 미혹과 배교의 길에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이 성도를 진리로 인도하고 성도를 항상 주 안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기름부음이 무엇이기에 이와 같은 고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일까? 다음의 말씀을 보면 기름부음이란 성도를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해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보내신 보혜사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기름부음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과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보내실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사도 요한은 성도에게 영원히 내주하시면서 성도를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교훈하시고, 인도하시고, 깨우치시는 성령의 사역을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굳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어두운 영의 눈을 밝혀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염두해야 한다. 특히 사도 요한이 미혹하는 거짓 영을 대적하라고 강조하는 부분에서 기름부음이라는 구약의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않고 참 진리 안에 뿌리를 내려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기름부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이 있는 성도임을 보이는 명확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진리에 입각하여 온전하게 믿고, 그리고 교회를 건강하게 섬기는 것이다.
기름부음(anointing)은 미혹을 포장하는 언어로 전락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신사도운동가들은 기름부음을 미혹을 포장할 여지가 있는 언어로 전락시켰다. 80년대 이후 새로이 나타난다는 거짓된 성령세례 이론을 개발하고서 마귀의 장난을 극도로 미화시켰다. 그리고 더욱 교묘하게 속이기 위해 “성령의 어노인팅”(anointing, 기름부음) 개념을 주입하였다. 이제는 그 거짓이 도처에 퍼졌다. 많은 목회자이 이 이론에 오염되어 아무 때나 어디서나 기름부음을 구한다. 자신이 인도하는 예배에 기름부음이 임하기를 구하고, 설교에 기름부음이 넘치기를 구하고, 자신이 사는 도시에 기름부음이 임하기를 위해 기도하자고 외친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기름부음이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하게 알게 하는 성령의 사역인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기름부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상상하는 것은 보이고 느낌으로 다가오는 성령의 권능(?)이다. 쓰러지거나, 부들부들 떨거나, 잠시 몽롱한 상태로 드러눕거나, 방언을 흥얼거리거나, 찌릿한 감이 전류처럼 몸속으로 흐르거나, 간부가 누웠던 침상의 구겨진 이불처럼 난잡하게 뿌려진 더러운 금가루에 환호하거나. 바로 이런 것들이 성령의 어노인팅이라고 한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상한 감성과 느낌에 이끌려 열광하는 것이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그런 교회에는 열광적으로 노래를 인도하는 사람이 많고, 노래와 음악에 취해서 함께 미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기름부음이 넘친다고 자랑한다. 지금은 굳이 기름부음이라는 단어를 쓸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이라는 더욱 정확하고 선명한 용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과 지배하심을 의미하는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하였지 언제 기름부음을 받으라고 하였는가? 굳이 기름부음이라는 구약의 용어를 새삼스럽게 사용하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명확한 의미가 전달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고 닮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 마귀의 미혹을 받지 않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 등 이러한 개념이 명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런데 손 장로는 난데없이 “성령의 권능 = 기름부음”이라는 도식을 들고 나왔다. 도대체 그 권능이 무엇인가? 도대체 그 성령의 권능이 기름부음이라는 근거는 성경 어디에 근거하는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공생애 동안 성령의 권능을 행사하실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게하고.’ 결국, 예수께서는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후에 권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르치심에 권세가 있고,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선포하시고, 권능으로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신 것도 바로 기름부으심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손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것을 잘못 이해하였다.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는 것은 죽을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시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지목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십자가의 제사로서 늘 반복되는 구약의 짐승의 피 제사를 폐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메시야로 세우심 받았고, 왕과 선지자가 되심을 의미하는 기름부음이었다. 그런데 손기철 장로는 이 크고 위대한 비밀을 간과하고 기껏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을 행하심이 기름부음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예수처럼 기름부음을 받아야 능력이 나온다! 나도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고 엉뚱한 오해를 가지게 된다.
성령의 권능의 나타남이 기름부으심이라는 손 장로의 주장의 근거는 성경에 없다. 그의 이론은 신사도운동가들의 이론과 황당한 행실에서 근거하였다. 신사도운동의 대부인 피터 와그너의 책을 보면 그도 사람들이 신사도운동가들에게 기도 받고 드러눕거나, 몽롱하고 흐릿한 의식에 빠져 한 동안 시간을 보내거나, 몸이 떨리는 현상을 보고서 기름부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존 윔버가 인도하는 수업의 실습시간에 존 윔버의 기도를 받은 학생들에게서 나타났던 현상을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예외 없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어 주셨다. 많은 학생들이 육체적인 질병을 고침 받았고, 또한 많은 학생들이 정신적, 영적인 치유를 경험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졌었다. 어떤 학생들이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서 다른 병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며 떨었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누워있었다.”
결론: 손 장로의 기름부음은 신사도운동의 기름부음이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개념은 교회사에서 이렇게 나타났다. 존 윔버의 빈야드운동에서 나타났던 이상한 현상들이 그 시작이었고. 이어서 토론토에서 또 시작된 웃음부흥과 그 뒤에 플로리다 펜사콜라의 빈야드 부흥에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더욱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손 장로는 자신이 치유사역의 길에 들어서서 성공하게 되는 과정에서 헌터 부부의 사례가 큰 도전과 감동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헌터 부부(Charles &Frances Hunter)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평신도인 그들은 처음에 약 1,000명을 위해 기도했는데, 나은 사람은 고작 10명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한 결과, 지금 그들도 세계적인 성령 사역자로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이야기를 읽고 힘을 얻었습니다.”
헌터 부부는 토론토공항교회의 부흥강사로 초청받아 최초로 웃음부흥을 일으킨 랜디 클락(Randy Clark)에게 기름부음을 전수하였고, 그 시절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런 기름부음을 전수하여 가는 곳마다 미친 웃음이 홍수를 이루고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게 한 버린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Rodney Howard-Browne)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후 헌터 부부는 평신도임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하워드 브라운에게서 나타난 기름부음을 동일하게 확신시켰다. 헌터 부부를 통하여 수많은 목회자들이 쓰러지고 발작하면서 웃는 기름부음이 도처에서 쏟아졌다. 영국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였던 콜린 다이도 헌터 부부에게서 그런 기름부음을 받았다. 한 번은 아일랜드에서 찾아와 그 부부의 집회에 참석했던 20여명의 성도들이 헌터 부부가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주체하지 못하며 웃게 하는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이런 기름부음이 우리 아일랜드 땅에도 임하기를 원합니다.”
손 장로가 헌터 부부를 비롯하여 존 윔버, 피터 와그너, 랜디 클락, 하워드 브라운 등의 굴지의 거짓 기름부음의 사도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마치 맑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래서 손 장로가 말하는 기름부음이 신사도운동의 기름부음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산이다. 다를 것이라는 기대와 추측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우리의 동족이고, 지성의 요람인 대학의 현직 교수이고, 외모와 예절이 세련되었고, 대한민국 최고의 교회라고 소문난 온누리 교회의 장로이고, 유명한 하용조 목사의 긴밀한 후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이철 / 캔톤한인교회 담임 (뉴스앤조이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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