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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비아 제일장로교회

목회자 컬럼

교회 안에서 호칭

웹지기 2015.01.31 14:07 조회 수 : 330

주일 2015-02-01 

구한말 전라북도 금산에 큰 땅을 소유한, 조덕삼이라는 지주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재산이 많을 뿐 아니라 머슴도 여럿 거느리고, 교회에도 헌금을 많이 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지주 조덕삼은 첫번째 장로 선거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체면을 단단히 구겼으니 남을 탓 하거나 교회를 떠날 수도 있지만, 거기에 개의치 않고 변함없이 교회를 섬기다 결국 장로로 선출됩니다.


조덕삼 장로는 자기가 부리던 머슴 중에서 믿음이 좋고 재능있는 마부를, 평양 신학교에 입학시켜서 장학금을 주며 공부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마부 이자익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다음에는, 자기가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로 모셔다 죽을 때까지 섬깁니다. 기독교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신분상 서열이 뚜렸한 구한말에, 자기가 부리던 머슴을 담임 목사로 모셔다 섬긴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대단한 파격입니다.

나중에 총회장이 된 이자익 목사의 유명세 때문에 조덕삼 장로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파뭍혀 버렸지만, 지금도 그 생생한 이야기는 듣는 모든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만듭니다. 더구나 사람들을 빈부귀천이나 사회적인 위세에 따라 판단하고 흔들리는 현대 교회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더운날 냉수같이 시원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만나 전도한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낼 때,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라고 당부합니다. 교회안에서 믿음의 형제끼리는 설령 종과 상전의 관계라 할지라도, 더 이상은 사회적 주종관계가 아닌, 한 피 받아 한 몸이룬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과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그런 성경적 원리가 과연 서로의 관계에서 잘 적용이 되는지요? 아직도 교회 안에서조차 빈부귀천을 따지거나, 사회에서 쓰는 직함으로 상대를 부르지는 않는지요? 그래서 교회 직분을 부르는 대신, 박사님, 교수님, 사모님이라 부르지는 않는지요? 그걸 보고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실까요? 물론 믿지 않는 분은 사회적 직함을 불러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끼리는 비록 작은 일 같아 보일지라도, 호칭 하나까지라도 좀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작은 호칭 하나가 부르는 사람의 가치관을 담아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