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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not a fan 팬인가, 제자인가

김순혜 2015.03.01 12:18 조회 수 :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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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 a fan

          팬인가, 제자인가

                                             카일 아이들먼 지음


Part 1 가장 행복한 부르심, 나를 따르라


Chapter 1 (팬인가, 제자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인가? 이 질문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예수님의 제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자동차 뒤에 예수 물고기 스티커를 붙인’사람들이다. 즉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열심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해도 정작 심판의 날 그분이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마7:23).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따르든 말든, 예수를 좋아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널려 있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나서도 자신 있게 제자라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제자가 아니라면 뭘까? 그들은 그냥 ‘팬’이다. 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전적 정의는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팬은 맨몸에 페인트칠을 하고 축구장에 가서 관람석에 앉아 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이다. 팬은 선수가 사인한 운동 셔츠를 벽에 걸어두고 자동차 뒤에 온갖 범퍼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지만 정작 경기에 나서지는 않는다. 경기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거나 공을 차지는 않는다. 선수들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지만 선수들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고함을 지르며 응원을 하지만 경기를 위해 희생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응원하는 팀이 자꾸 패하면 그 좋아하던 마음도 조금씩 식어가고, 심지어는 다른 팀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팬은 어디까지나 팬일 뿐이다.


요즘 예수님 주변에도 팬이 많다. 팬은 일이 잘 풀릴 때는 예수님을 응원하지만 반대 상황에 이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돌려 다른 선수에게 들러붙는다. 팬은 안전한 관람석에 앉아 응원만 할 줄 알지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조금도 모른다. 예수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도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관계 중에 스타와 팬의 관계는 없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젯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따를 생각은 추호고 없는 팬들이다. 온갖 혜택을 바라며 예수님의 주위로 몰려드는 팬들은 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할 만큼 그분과 가깝지는 않다. 팬은 단순한 열광을 진정한 헌신으로 착각한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깊은 친밀감으로 오해한다. 행동하지 않고 말로만 때우려 한다. ‘팬’의 가장 흔한 증상 중 하나는 자신이 제자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팬인가 제자인가? 하는 문제는 객관적으로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이 질문에 답하기 때문이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 제자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팬에 불과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 비추어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평가하며, 그렇게 평가한 결과가 평균 이상이면 썩 괜찮다고 스스로 안심하는 것이다. 또 다른 기준은 종교적 법이다. 팬은 자신이 종교적 법과 의식을 잘 지키기 때문에 진정한 제자라고 말한다. 또한 교파와 가문과 성경 지식을 들먹이며 자신이 진정한 제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하는 기준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을 때에만, 우리는 그분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Chapter 2 (말뿐인가? 행동인가?)  말로만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등장한다. 종교 지도자들의 엘리트 집단인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고, 널리 존경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니고데모는 일찌감치 예수께 열광해 왔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분의 놀라운 기적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분의 넘치는 사랑과 연민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면 잃을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몰래 예수님의 팬으로 활동하면 잃을 게 별로 없었지만 제자의 길에는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그는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선택할 것인가? 에 대해 기로에 섰다. 그러나 종교를 잃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를 방법은 없다. 지금도 종교는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요3:2). 예수님을 만난 니고데모는 결국 진실 앞에 서게 된다. 삶이 뿌리째 흔들리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방법이 없다. 예수님을 따르면 뭔가를 잃을 수 밖에 없다. 니고데모에게 그것은 높은 지위, 동료들의 존경, 수입, 우정, 가족과의 관계였다.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내놓았는가? 예수님 때문에 삶이 조금 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삶을 뿌리째 뒤흔들기를 원하신다. 팬은 약간의 손질만을 할 생각이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수리를 말씀하신다. 팬은 약간의 조정을 생각하며 예수님께 오지만 예수님은 완전 분해 수리를 계획하고 계신다. 팬은 몇 가지 장식을 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완전 개조를 원하신다. 팬은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기를 원하신다.


먼저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낮이 아닌 야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의 속내를 꿰뚫어 보시고 3절에서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존경 받는 종교 지도자 니고데모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씀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종교적인 이력을 쌓아 왔지만, 예수님은 그의 의로운 행위와 종교 의식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 맺는 믿음을 찾고 계신다.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따르지 않는다면 팬에 불과할 뿐이다. 대개 우리는 뭔가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이거나 감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대상을 실제로 따라야 진짜 믿음이다. 따르는 것은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손발로 움직이는 것이다. ‘믿음’의 메시지와 ‘따름’의 메시지가 분리될 때 균형이 깨지게 되는 것이다. ‘믿음’과 ‘따름’은 믿음의 심장과 폐와 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믿음의 메시지에서 따름의 메시지를 떼어 내면 믿음은 곧바로 죽어 버린다. 따름은 믿음의 일부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분을 따르게 되어 있다.


니고데모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조금도 숨기시지 않으신다. 그 누구도 대가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모세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무시무시한 바로 왕 앞에 서야 했고, 노아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뭇사람의 조롱을 견뎌가며 방주를 지어야 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따른 좌로 사자 굴에 던져져야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진정한 제자의 모습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밤낮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그러려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 회개 없이는 용서도 없고,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고,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고소할 빌미를 찾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고, 그 중에는 니고데모도 있었다. 결국 그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옹호한다(요7장). 이 순간 니고데모는 단순한 팬의 길을 떠나 제자의 길로 접어 들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장례식 준비가 한창일 때, 니고데모는 비싼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온다.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숨었을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과 헌신을 드러냈다. 어두운 밤에 말로만 표현 되었던 믿음이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했다. 니고데모는 더 이상 숨은 팬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제자로 거듭난 것이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그는 1세기의 어느 날 순교했다고 한다.


Chapter 3 (지식인가? 친밀함인가?) 반쪽 짜리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이라는 종교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 모르는 게 없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다. 바리새인처럼 팬들도 머리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연구하지만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는 않는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넘쳐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는 못한다. 지식과 친밀함, 이것이 팬과 제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 중 하나다.


팬은 지식과 친밀함을 혼동한다. 팬은 예수님에 관해 아는 것과 그분을 진정으로 아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교회 안에 팬이 많은 것은 교회의 교육 방식이 지식만을 쌓아줄 뿐 친밀한 관계는 만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알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앎은 단순한 지식보다 더 깊은 차원의 앎을 의미한다. 성경은 창세기 4:1절의 관계에 대해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다. 여기서 “알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다yada)’이다. 이 의미는 ‘서로를 완전히 아는 것’ 즉 남편과 아내가 지극히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차원에서 깊은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를 완전히 알아가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그림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가늠해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러한 종류의 앎을 원하신다.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지칭하는 표현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앎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용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예수님이 제자로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친밀하게 알아야 제자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저녁 만찬에 초대를 받으셨다. 이런 만찬회에는 몇 가지중요한 에티켓이 있었다. 귀빈이 오면 입맞춤으로 환영하는 것이 관례였고, 손님의 사회 계급이 자신과 동등하면 뺨에 입을 맞추었다. 1세기 중동지방의 또 다른 에티켓은 발을 씻는 것이다. 식사 전에는 반드시 발을 씻어야 했고, 정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이 직접 발을 씻겨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종을 시켜 손님을 발을 씻기게 했다. 정말 귀한 손님에게는 머리에 부을 기름도 제공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서 입맞춤의 환영을 받지 못하셨다. 발을 씻어주는 과정도 없었다. 머리에 부을 기름도 없었다. 시몬은 평생 성경을 연구해 온 사람이지만, 그는 정작 눈 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정작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의 변화를 받았던 ‘죄를 지은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내고, 그 발 위에  향유를 통째로 가져다가 붓고 입맞춤을 한다(눅7:44-46). 결국 모든 지식을 갖춘 종교 지도자는 팬이었고 예수님께 친밀한 애정을 표현했던 창녀는 제자로 판명이 났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눅7장의 이 여인처럼 예수님과 친밀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가? 예수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쏟아 낸 적이 있는가?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해 본 적이 있는가? 창피를 무릅쓰고 예수님께 애정을 표현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가?


Chapter 4 (많은 애인 중 단 한 명? 단 하나뿐인 애인?)  대가를 제대로 알고 시작하라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5-26)

예수님의 관심사는 헌신의 깊이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면 가족,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미워하라’는 표현은 ‘나를 더 사랑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안에서 여러 사랑이 첫 번째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해보자. 예수님, 배우자, 자식, 친구, 형제가 출발선에 쭉 늘어서 있다. 이 경주에서 예수님이 일등으로 들어오면 끝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인생의 첫 번째 자리를 위한 경주의 트랙에서 그분 홀로 달리시는 것이다.


팬은 예수님을 여러 애인 중 한 명으로 생각한다. 그 중에 좀 나은 팬은 예수님을 여러 애인 중 가장 아끼는 애인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지 분명히 못박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단 하나뿐인 애인이 되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다른 누구와도 우리의 사랑을 나눌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분을 따르려면 절대 한 눈을 팔지 말고 전심으로 따라야 한다. 다음 질문들은 예수님이 당신에게 여러 애인 중 한 명인지 하나뿐인 애인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성심껏 답하면 무엇이 예수님에게서 당신의 사랑을 빼앗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1.무엇을 위해 돈을 쓰는가?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시간과 돈을 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엇을 따르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이 무엇보다도 돈 얘기를 자주 꺼내신 것은 돈이 예수님의 경쟁 상대로 떠오를 때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만족을 줄 것만 같은 물건에 시간과 돈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만족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갈증을 영원히 해소해 줄 수 있는 생명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영원한 만족을 주겠다는 돈의 거짓 약속을 믿고서 예수님을 헌신짝처럼 내버린다. 우리는 돈과 예수님을 동시에 좇을 수는 없다. 두 길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으니 오직 한 길만 선택할 수 있다.


2,힘들 때는 어디에서 위로를 얻는가?

삶이 고달플 때 누구 혹은 무엇에 의지하는가? 부모나 배우자? 냉장고에 먹을 거리? 아니면 시름을 잊고자 일에 파묻히는가?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경쟁상대가 될 수가 있다. 가족과 친구에게 위로를 얻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나님은 원래 우리를 서로 위로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대신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다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진정으로 믿는 대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생의 쓴 맛에 괴로워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실직의 순간, 소중한 관계가 깨졌을 때, 시험 점수가 예상보다 훨씬 낮았을 때, 그때 누구에게 달려갔는가? 그 답을 보면 당신이 진심으로 따르는 대상을 확인할 수 있다.


3.어느 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가?

언제 불같이 화를 내는지를 보면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만약에 세상적인 것 때문에 하루를 망칠 정도라면 그것을 필요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물론 실망스러운 일을 겪으면 화가 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화를 낸다면 그 화의 대상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증거다.


4.어느 때 가장 신이 나는가?

우리를 실망시키는 대상 못지않게 우리를 흥분시키는 대상도 예수님의 경쟁상대일 수 있다. 스포츠, 미술, 음악, 일, 외모 등 이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훔쳐가는 주범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함은 그분만을 따른다는 뜻이다. 팬은 예수님을 자기 마음의 보좌로 모실 생각까지는 없다. 대신 그분을 마음의 소파에 눕히고 베개 하나만 던져줄 뿐이다. 팬에게 예수님은 마음이라는 공간을 나눠 쓰는 수많은 손님 중 한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한 조각에는 관심조차 없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돈이나 직업, 심지어 가족과도 우리를 공유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이 누구와도 우리의 사랑을 나누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단순히 전적인 사랑을 받기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면 오직 그분만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다른 모든 대상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반쪽 짜리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오직 전심을 쏟는 관계만을 원하신다. 팬은 이 조건이 협상 불가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제자다”라고 말하려면 그 대가를 제대로 알고서 해야 한다.


Chapter 5 (율법인가? 은혜인가?) 종교 활동을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당신은 팬입니까? 제자입니까? 그렇게 물으면 팬은 자신 있게 “제자”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노력하거나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제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팬들은 열심히 따르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따르는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표적을 겨냥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닌 종교적 규칙과 의식을 따르고 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라는 팬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어느 모로 봐도 제자처럼 보였다. 그들은 성경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었고, 특히 율법 준수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종교 규칙은 예수님이 가장 중시하는 표적이 아니다. 종교 규칙을 잘 따르면 외양은 그럴듯해진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의 속에 있다. 안타깝게도 이 종교 지도자들의 속은 겉만 못했다. 사실 대부분의 팬이 그러하다. 마23장 설교에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시면서 종교 지도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신다. 그렇다 규칙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은 보통 심각한 착각이 아니다. 이 종교 지도자들처럼 종교 규칙만 잘 따르면 제자인 줄 아는 팬들은 예수님께 쓴 소리를 들어 마땅하다.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종교 지도자들은 72명의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공회 안에는 성경을 매우 자유롭게 해석하는 사두개인들과, 보수적인 바리새인들의 두 부류가 존재했다.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의 역할을 맡았으며 타고나야 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집안과 상관 없이 노력만으로 될 수 있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대부분의 팬이 이 두 부류 중 하나에 속한다.


사두개인들과 같은 팬들의 믿음은 태생적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아 그리스도인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기독교 음악을 들으며 자랐지만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적은 없다. 마음으로 믿지는 못하고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가 없어 믿는 척만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바리새인과 같은 팬들도 있다. 그들은 얼마나 열심히 율법을 배우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믿음을 저울질한다. 그들이 겨냥하는 표적은 올바른 지식과 행동이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말과 행동과 다르다. 아무리 말과 행동이 반듯해도 그것만으로 예수님이 기뻐하시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신다.


이 종교 지도자들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위선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들의 면전에 대고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연연했다(마23:5).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것은 그들의 가면일 뿐 진짜 모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형태의 팬이다. 예수님은 종교적 자격증으로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팬들을 호되게 꾸짖으셨다. 하지만 이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그토록 심한 말을 퍼부으셨던 예수님이 비록 겉은 부족해도 진심을 내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온화하고 상냥하게 다가가셨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렇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완벽을 기대하시는 건 아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진정성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을 위장하지 않는 모습,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7-28).

팬들의 믿음이 이와 같다. 그들의 믿음은 속으로는 썩어 있지만 겉으로는 더없이 깔끔하다. 몇 해 전 한 제약회사에서 C형 간염 치료제 광고를 내보낸 적이 있다. 그 광고에 따르면, C형 간염은 걸려도 한동안 겉으로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속은 계속해서 망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광고에 나온 사람의 얼굴은 점점 흉해져 갔다. 그러다가 광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자막이 나타났다. “C형 간염이 이처럼 간이 아닌 얼굴을 공격한다면 다들 가만히 계시지 않겠지요?” 썩은 속이 훤히 드러나도 계속해서 병을 방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썩은 속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면보다 외면을 더 중시하는 태도의 여러 가지 증상들을 지적하신다. 마23:13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뿐 아니라 그들이 추가한 수만 가지 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예수님이 규칙에 얽매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한 말을 서슴지 않은 것은 그들이 부담스러운 규칙을 강요한 탓에 사람들이 규칙만이 아니라 제자의 길에서도 떠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꾸어진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규칙을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율법의 글자 하나하나에만 얽매일 뿐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남용했으며(마23:16-17), 율법의 조문만을 지킬 뿐 그 정신은 놓치고 있었다. 여느 팬들처럼 그들은 모든 종교 의식을 힘들여 지키되 하나님의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는 못했다. 종교의 껍데기만 갖추었을 뿐 그 정신은 온데간데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사람들의 상처를 하나님의 법으로 더욱 헤집어 놓았다. 사랑보다 법을 중시하고 관계보다 규칙을 더 따지는 것은 엉뚱한 과녁을 겨냥하는 것이요 전형적인 팬의 증상이다.


규칙을 강요할 때 가장 손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죄책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마23:4절(“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을 보면 예수님은 이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칙들의 집합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심어 준 죄책감을 무거운 짐에 빗대신다. 예수님이 아닌 규칙만을 따르는 팬들은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있다. 이런 죄책감과 두려움의 키워드는 ‘노력’이다. 팬들은 실수를 만회하여 하나님의 눈에 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반면, 은혜의 키워드는 ‘완료’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벌을 대신 받으셨다. 예수님이 길이 없는 것에 길을 내신 덕분에 우리는 이미 완료된 일에 감사하며 자유롭게 살면 된다. 팬은 ‘노력’을 외치지만 제자는 ‘완료’를 축하한다.

팬은 평생 무거운 종교의 짐을 짊어지고 남들에게도 그 짐을 강요한다. 내면과 어울리지 않는 외양을 유지하며, 어떻게든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규칙을 모조리 지켜보려고 해 보지만 날이 갈수록 파김치가 되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종교에서 해방시키려고 오셨다. 기나긴 규칙의 리스트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 진짜 모습보다 더 좋은 척 하는 사람들, 종교로 인해 두려움과 죄책감에 짓눌린 사람들, 종교에 신물이 난 팬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Chapter 6 (자신의 힘인가? 성령의 충만인가?)자신의 힘을 의지하면 여지없이 깨진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성령의 능력 없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면 오래지 않아 증상이 나타난다. 그 증상은 바로 짜증과 분노다. 원하는 행동은 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행동만 하게 되니 화가 나게 된다. “이번 만큼은 다를 거야”하면서 다짐에 다짐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매일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애써 봐야 매번 실패하고 좌절할 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면 인생의 무게에 무릎을 꿇고 만다. 얼핏 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같지만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며 자기 힘으로는 결코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풍랑 속에서도 그분께 꼭 붙어 있지 않으면 실망스러운 일이 자꾸만 꼬이기 마련이다. 제자는 성령의 능력 없이는 인생의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이것이 그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따라서 문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마음이 있느냐다. 팬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해도 그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다. 1세기 갈라디아의 교회가 그러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은혜의 메시지를 설파하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바울이 다른 도시로 떠나자마자 ‘유대교 지지자들’이라고 하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침투해 사람들을 다시 율법의 굴레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보다 인간의 노력을 강조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고 싶은가? 그 출발점은 먼저 자신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자신의 약점을 어떻게든지 숨기려 든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자신의 약점을 인정해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들어올 여지가 생긴다고 말한다(“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그렇다 자신의 약점을 훤히 드러내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팬들은 좀처럼 약점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약점은 철저히 숨기고 강점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떠벌린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에서 벗어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고 성령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한다(“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5:25). 발걸음 하나마다 성령 안에서 걸어가며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한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와 거하시면 우리 안에서 자기 자신의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 자신의 교만과 분노, 이기심, 정욕이 점점 밖으로 배출된다. 어둡고 지저분한 요소는 자꾸만 빠져 나가고 성령이 점점 충만해진다. 그 다음에는 들이쉬는 것이다. 들이쉬는 것은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께 삶의 통제권을 넘겨 드리는 것이다. 이 영적 숨쉬기를 연습하면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 제자는 매 순간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고 그분의 능력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살아간다. 날마다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고 그분의 능력을 얻기 위해 쉼 없이 기도하면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하던 것이 제2의 천성처럼 자리를 잡는다.


팬들은 제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다가 결국 제 풀에 쓰러지고 만다. 자기 힘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면 녹초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능력을 주실 것이라 약속해 주셨다. 예수님의 제자는 홀로 여행을 마칠 수 없다는 진리를 아는 자다. 우리는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에게 필요한 힘과 지혜를 초자연적으로 공급해 주실 것이다.


Chapter 7 (의무인가? 관계인가?) 예수님과 가슴과 가슴이 통해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을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제자의 궁극적인 조건은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친밀한 앎이 있어야 한다. 팬들은 말과 행위만을 따진다. 말과 행위는 가시적이며 점수를 매기기 쉽다. 하지만 예수님은 친밀한 관계를 참된 제자의 조건으로 제시하신다. 착한 말과 행위는 모두 그분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외식을 나가면 아내는 내가 식당 텔레비전을 보는 꼴을 봐주지 못한다. 내가 텔레비전을 푹 빠져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대화가 끊길 때 잠깐 텔레비전을 보는 것 뿐인데…세월이 흐르면서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모습, 바로 그것이 아내가 내게서 원하는 관계였다. 나는 근사한 식당에서 외식했다는 사실을 좋은 남편의 증거로 내세웠지만, 아내에게는 그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 아내는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는 데이트를 데이트로 여기지 않는다. 즉 아내가 원하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들이다. 귀에 즐거운 말이나 자상한 행동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다. 하나님은 신앙의 행위나 종교적 규칙의 준수나 찬미의 말보다도 서로를 깊이 아는 관계를 원하신다. 이러한 관계가 바탕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예언과 귀신 쫓기와 기적도 허사다. 예수님은 뭐든 적당히 하는 미지근한 팬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계3:16). 그분은 절대적으로 헌신적인 제자만 원하신다.


Part 2 가장 고통스런 부르심, 자기를 부인하라


Chapter 8 (열린 초대) 부르심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팬에서 제자로 변모하는 여행의 출발점은 자기 안의 팬을 발견하는 시점이다. 예수님이 이 땅을 거닐 때 여러 사람과 만남을 가지셨는데,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관계에 대한 진실한 순간으로 이끄셨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한낱 팬으로 판명이 났지만, 그들이 팬이라고 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자기중심적으로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 가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실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요3:16절은 믿음을 강조한다. 눅9:23절은 따름을 강조한다. 이 둘은 반드시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믿음은 없다. 눅9:23절이 없는 요3:16절은 반쪽 짜리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아무든지”라는 말씀으로 초대의 메시지를 시작하신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따라오지 말고, 그분의 조건을 정확히 알고 그래도 원하는 자만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따라오라고 초대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따르는 법도 가르쳐 주신다. 세리였던 마태가 어둡고 얼룩진 과거를 뒤로 한 채 모든 걸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해서 당장 완벽한 사람으로 거듭난 건 아니다. 당장 겉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뒤에도 계속해서 그분의 은혜가 필요하다. 내 의지와 달리 팬으로 사는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마태에게 하셨던 은혜의 초대를 매일같이 받아 들인다. “나를 따르라”


Chapter 9 (열정적 추구) 불같은 사랑으로 예수를 따르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초대에서 뒷부분은 제자들에게는 완벽하게 이해가 가는 말씀이지만, 팬들에게는 그저 황당하기만 할 뿐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지 명확히 밝히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은 더없이 분명하다. 이 구절에서 “따라오려거든”이란 말에 주목해 보자. 실제로 예수님은 애인을 열정적으로 좇는 사람처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과 자원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붓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서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면 전부를 걸고서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면 값진 진주를 좇은 이 일꾼처럼 그분을 좇을 수밖에 없다. 팬은 너무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하지만 제자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놓아야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의 투자임을 안다. 제자는 사랑을 위해 미친 짓도 서슴지 않지만 팬은 몸을 사린다. 팬들의 생각은 전부를 걸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으니 적당히 하다가 여차하면 몸을 빼내겠다고 생각한다. 팬은 상처를 받을 위험 없이 즐기기만 원한다. 팬은 희생 없이 챙길 것만 챙겨 먹으려고 한다. 팬은 따라가지 않고 주춤거린다. 그렇다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모험까지 할 생각은 없을 뿐이다. 연애로 비유해 보자. 남녀가 꽤 오랫동안 연애를 해서 사이가 깊어졌다. 여자는 결혼을 생각한다. 그러나 남자도 여자를 사랑해서 그녀를 잃고 싶지는 않지만 결혼까지는 생각이 없다. 결혼이란 굴레에 갇히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냥 함께 사는 건 어때? 즉 서로를 구속하지 않은 채로 결혼의 혜택만 누리는 건 어때?” 팬의 자세가 그와 같다.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명령이 아니라 초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를지는 바로 선택의 문제다. 사랑에 관한 기본 중 하나는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를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우리가 제대로 알고 따라오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신다. 우리의 하나뿐인 애인이 되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관심 대상은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가 열심히 그분을 좇을 때 그분은 기뻐하신다. 그분께 우리의 시간과 돈과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분을 진심으로 좇을 때 나타나는 외적일 증거일 뿐이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에 맞는 외적인 증거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예수님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좇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 감격하여 사랑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다는 사랑 이야기는 최고의 사랑 이야기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좇으셨다. 이 사랑을 알면 우리의 마음이 녹아 내릴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한다.


여태껏 팬으로 살았지만 이제 제자가 되고 싶다. 그런데 영 마음이 동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기는 한데 무감동하고 냉담한 마음이 도대체 풀어질 줄 모른다. 얼마 전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를 꽤 깊이 연구했던 적이 있다.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의 리스트가 생긴 배경을 조사하던 중 한 가지 죄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태’는 죽음에 이를 만큼 치명적이지 않아 보였다. ‘나태’로 번역된 단어는 ‘아시디아(acedia)’이다. 내가 볼 때 이 단어를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영적 무관심’으로 번역하는 게 옳지 않나 싶다. 영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래도 상관 없어’라고 말한다면 보통 심각한 죄가 아닌 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아들을 보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다. 덕분에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마는 것, 이것이 아시디아이며 팬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죽음의 질병이다.


 “너희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열정의 불이 꺼졌다. 예전에는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따라 다녔으나 언제부터인가 흥미를 잃었다. 바로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그랬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열정이 식어 버렸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네 청년의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을 기억하라고 촉구하신다(렘2:2). 하나님과의 신혼 기간은 끝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다시 따를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내린 처방대로 하면 된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아시디아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 뒤 예전의 행동으로 돌아가라. 예전처럼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아뢰라. 차 안에서 가스펠 송을 틀고 따라 부르라. 하나님께 다시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 정열적으로 그분을 좇으라.


Chapter 10 (완전한 포기) 인생의 근사한 권리를 모두 포기하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제자로 초대하신다. 먼저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준 뒤에 따라오라고 하신다. 이제 청년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재물과 권세를 따를 것인가?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를 길은 없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결국에는 비슷한 기로에 서게 된다. 세상의 길을 떠나지 않고서는 절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지만, 예수님과 재물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에 이르자 결국은 재물을 선택했다. 청년은 자신을 부인할 수 없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리려는가?


제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매일 선택하는 사람이다. 설령 자신의 전부를 잃는다 해도 그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하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일편단심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깊은 사랑은 무엇보다도 희생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 제자들이 자신을 ‘노예’로 소개했다. 베드로후서의 첫머리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종…시몬 베드로”로 소개한다. 요한과 디모데, 유다도 자신에게 같은 명칭을 붙였다. 야고보는 자신의 서간문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바울이 로마인 들에게 보낸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로 시작된다. CCC(Campus Crusade for Christ)를 창립한 빌 브라이트의 묘비에는 “예수님의 노예”라고만 새겨져 있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욕심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행복을 으뜸으로 치며, 자신을 챙겨야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기 탐닉의 극단에 서 있는 자는 자기 부인의 길을 걷기가 그토록 힘든 것이다. 행복의 권리는 자기 부인의 부름과 정면으로 배치돼 보인다.


우리 대부분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벌고 큰 집에서 살며 좋은 차를 끌고 남부럽지 않은 휴가를 즐겨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다. 아이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면 그런 가치관이 배어 있는 대답이 돌아온다. 커서 노예가 되겠다고 말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노예로 부르고 있다. 성경은 인생 최대의 소명이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노예’는 제자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자신을 노예로 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주님으로 번역된 단어는 대개 ‘쿠리오스(Kurios)’이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수백 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노예의 주인이나 소유주를 지칭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단어는 ‘둘로스(doulos)’다. 둘로스는 제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약 130번 등장하는데, 대개 ‘종’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노예’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종은 남을 위해 일하는 일꾼이지만 노예는 남의 소유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곧 자신이 노예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기 부인의 실질적인 의미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초대를 받아들이면 그분의 노예가 된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노예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 놓으셨다. 보통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강제로 노예상태가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노예로 초대하고 계신다.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다. 노예는 모든 권리를 주인에게 양도한 사람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마침내 자신의 소유에다 자신의 존재까지도 내려놓을 때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의 노예가 되어야만 마침내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다.


자신을 부인하면 손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의 주인인 예수님은 늘 풍족하게 공급해 주신다. 주인은 내 필요를 채워 주시고 나를 보호해 주신다. 주인께는 죄를 용서할 능력이 있다. 죄의 노예가 되면 인생이 조각나지만 내 주인은 인생의 깨진 조각들로 멋들어진 모자이크를 만들어 내신다. 녹초가 되었을 때 주인께 찾아가면 지극히 평안한 쉼을 주신다. 그리고 내 주인의 노예가 되면 그분의 아들이요 딸로 삼아 주시고 친구라 불러 주신다. 교회에 열광하는 팬이 아니라, 경영자와 판매원, 의사, 교사, 학생 등 갖가지 모습을 한 노예들로 꽉 차면 얼마니 좋을까?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의 전부에 대한 권리를 양도해야 한다. 아무것도 움켜쥐지 말아야 한다. 즉 자신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Chapter 11 (날마다 헌신) 죽고 또 죽으라

제자의 슬로건과 심벌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와서 죽으라(Come and die)”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부르실 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본회퍼). 그리스도의 제자의 심벌은 바로 십자가다. 고문과 죽음의 도구가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하는 심벌이다. 십자가는 로마인들이 유대인 같은 피정복민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처형도구다. 십자가는 로마의 힘과 권위를 드러내는 심벌이었다. 또한 십자가는 굴욕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만인 앞에서 죄인을 욕보이기 위해서였다. 죄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의 머릿 속에 똑똑히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성경을 보면 병사들이 예수님을 심하게 욕보이고 조롱하고 침을 뱉었다. 예수님은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빌립보서 2장은 제자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되셨던 예수님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창조주요 구세주시며 만왕의 왕이요 우주의 주인이신 분, 그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욕을 당하셨다. 세상을 발 아래 두신 왕께서 세상의 발을 씻어 주셨다. 따라서 그분을 따르려면 겸손히 십자가를 지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낮아져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고통과 고난의 길이다. 편안하게 십자가를 질 방법은 없다. 십자가는 어디로 메나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고난은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사람에게나 찾아 온다고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따르면 만사가 순조롭게 풀려야 정상이 아닌가? 고난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증거라는 쓰레기 신학이 교계에 만연해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은 때로는 참을 수 없으리만치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감내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눅6:22, 딤후3:12, 빌1:29). 요즘 나를 자꾸만 일깨우는 질문이 있다. “아무런 고난과 희생도 없는데 과연 내가 십자가를 제대로 짊어지고 있는 건가?” 예수님을 따르다가 뭔가를 잃은 적이 있는가?” “예수님으로 인해 관계가 깨진 적이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승진을 포기한 적이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휴가를 반납한 적이 있는가?” 믿음으로 인해 조롱을 받은 적이 있는가?” 꼭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복음을 위해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면 과연 진정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십자가는 죽음의 심벌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죽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욕심과 꿈, 계획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 우리 자신은 끝나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래서 제자는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날 많은 교회가 너무 부담스럽고 치욕스럽다는 이유로 십자가의 메시지를 내던졌다. 그 결과, 제자를 자처하지만 십자가는 짊어지지 않는 팬이 교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비아돌로로사’라는 길로 가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역사와 교회 전설에 따르면 생전의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 중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걸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생을 마감했고, 마가는 이집트의 알랙산드리아에서 말에 질질 끌려 다니다가 숨이 끊어졌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교수형을 당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 도마는 인도에서 선교 여행을 하던 중 창에 찔렸다. 예수님의 형제 유다는 믿음을 버라지 않은 죄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난 행동을 깎거나 우리의 못된 성품을 미세 조정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가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한다.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 점을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게 전부를 주라. 너의 시간과 돈, 일의 일부는 필요 없다. 나는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육신을 고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 왔노라. 미봉책은 전혀 소용없다. 여기저기를 가지치기해 봐야 소용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무 전체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이빨을 갈아내거나 금을 씌우거나 구멍을 메워봐야 그때 뿐이다. 아예 뽑아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지고’는 죽음이 선택의 문제임을 말해준다. 보통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죽음을 피하려고 발버둥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생존 본능’이라는 말을 쓴다. 위험이 다가오면 자기 보호 기제가 우리를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끈다. 이것이 “와서 죽으라”는 슬로건과 십자가 심벌이 단순히 반문화적이 아니라 반직관적인 이유다. 생존 본능에 사로잡힌 우리의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왕의 왕은 갈보리라는 언덕 위에서 생명을 내놓으면서 우리에게도 그 본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흔히 쓰이는 “짊어져야 할 십자가”란 표현은 원치 않게 찾아 온 시련이나 무거운 책임을 지칭하는 숙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십자가는 억지로 지는 것이 아니라 원해서 지는 것이다. 요10:18절에서 예수님이 먼저 그 본을 보여주셨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노라 결심해야 한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한 차례의 결심이 아니다. 매일같이 죽고 또 죽어야 한다. 이것이 자기 부인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아침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 매일 아침 제단으로 돌아가 자신을 내려 놓아야 한다. 이것이 누가복음 9:23절에 기록된 주님의 초대다. 하지만 다음 구절에서 놀라운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신을 죽여야만 진정한 생명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삶을 발견한다. 죽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비결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에 관해 노래하는 것이다.

      패배를 상징하던 십자가 – 제자에게는 승리의 상징이라네

      죄책감을 상징하던 십자가 – 제자에게 은혜의 상징이라네

      유죄를 상징하던 십자가 – 제자에게는 자유의 상징이라네

      고난과 고통을 상징하던 십자가 – 제자에게는 치유와 소망의 상징이라네

      죽음을 상징하던 십자가 – 제자에게는 생명의 상징이라네

      흉물스러워 보이는 십자가 – 제자에게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네


Part 3 가장 충격적 부르심, 와서 죽으라


Chapter 12 (나는 ‘어디든지’간다) 예수님이 지시하면 어디든지 따라 나선다

예수님이 초대 메시지를 전하신 뒤, 누가복음 9장 끝 무렵에 진심으로 제자가 되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면 자기 삶의 특정한 부분이 피곤해질 것을 알자 그들은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과 조건을 협상하려는 것을 보니 그들은 팬이 분명하다. 57절에 첫 번째 팬이 등장한다. 그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찾아온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그러나 이 말에 예수님은 이 사람의 평온한 삶을 사정 없이 뒤흔들만한 곳을 가리키신다. “저기는 어떠냐?”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면 삶의 대대적인 변화를 각오해야 한다. 말 그대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 이것을 알고 나면 예수님의 초대가 갑자가 큰 의미로 다가온다. 나는 설교자의 아들로 자랐다. 우리 아버지는 여러 교회를 돌며 옛날식 부흥회를 인도하는 곳에 자주 나를 데려 가셨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뒤면 매번 찬송가<내게 있는 모든 것을>을 시작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시간을 가졌다. 열 살쯤 되었을 때 나도 이 찬송을 부르다가 정말로 모든 것을 주께 바치기로 결단했다. 여러 성도와 함께 제단 앞으로 걸어나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찬송가의 마지막 소절을 불렀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구주 앞에서 나 자신을 모두 드리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생각하고 섣불리 결단한 탓이었다. 예배 시간에는 “모두 드리네”라고 노래했지만 실제 삶 속에는 “일부만 드리네”가 내 노래였다. 내 교만을 내려놓지 못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는 남들에게 나를 과시하려는 욕구가 앞섰다. 내 계획도 내려놓지 못했다. 하나님을 내 삶으로 초대했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하나님을 기껏해야 부조종사 자리에 앉히고 조종 장치는 내 손으로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이기적인 욕심도 내려놓지 못했다. 여가 생활도 가려서 하지 못했다. 음탕한 생각도 비우지 못했다. 여전히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었다. 돈도 내려놓지 못했다. 하나님께는 남은 찌꺼기만 드렸다. 시간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못했다. 처음에는 가정도 내려놓지 못했다. 나는 구주께 모두 드리지 못했다.


이 첫 번째 인물처럼 많은 사람이 성급하게 약속부터 하고 본다. 그러나 막상 현실 앞에 서면 생각이 싹 달라진다. 당신은 어떤가? 예수님을 가장 따르기 어려운 영역 하나는 무엇인가? “어디든지”라고 자신 있게 말하긴 했지만 예수님이 제발 가리키지 말았으면 하는 영역은 무엇인가? 혹시 집에서는 어떤가? 종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잘 따르다가도 집에만 오면 십자가를 현관 앞에 내려놓고 들어가는가? 집에만 들어가면 져주지 못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가? 섬기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는가? 참을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꾸만 따지는가? 격려해 주지 못하고 매번 지적하고 비판하는가? 집에서는 영적 지도자 역할을 못하고 수동적이고 냉담하게만 구는가? 어디든지? 일터에서는 어떤가? 평일 오전 9시면 많은 팬이 예수님을 차에 두고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여기서 기다리세요. 다섯 시쯤에 모시러 올게요.” 팬들은 일터로 들어가는 순간, 제자의 옷을 벗어 던진다. 팬은 탐욕을 ‘야망’이라고 부르며 정당화한다/팬은 정직하지 못한 거래를 ‘사업수완’이라 부른다/팬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의 티를 절대 내지 않으면서 ‘배려’라고 말한다.


누가복음 9장의 이 남자는 “어디든지”라고 자신 있게 외쳤지만, 하나님이 “저기”라고 말씀하셨을 때 낯빛이 싹 변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어디든지’ 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저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령이 아닌 제안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9장의 이 팬에게 하신 말씀을 잘 관찰해보면 “어디든지”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이유 몇 가지가 드러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길을 위험하고 불확실한 여행으로 묘사하셨다. 예수님이 이 팬을 어디로 데려가실지, 심지어 머리를 누일 곳이나 있을지, 모든 것이 미지수였다. 그래서 그 팬은 선뜻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몰라 두려울 때 본능적으로 우리는 주저한다. 심리학자들은 두려움 앞에서 가장 흔한 대처법은 회피라고 말한다. 두려운 사람이나 장소에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이 팬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부담스러워서였다. 우리가 “어디든지”라고 말하면 예수님은 무조건 우리의 안전지대 밖에 있는 곳을 가리키신다. 안전지대 밖에 있는 곳은 바로 ‘나를 부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를 문자 그대로 정의하면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라 가면 남들이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죄인 곁에 이른다. 예수님을 따라 가면 남들이 피하려고 하는 병자 곁에 이른다. 예수님을 따라 가면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면 가족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다른 가족은 몰라도 예수님의 가족은 그랬다. 예수님을 따르면 정부 관리들에게 부당한 비난과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면 그분의 피로 뒤덮이고 만다.


Chapter 13 (나는 ‘언제든지’ 행한다.) 더 이상 변명하거나 꾸물대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59-60)


첫 번째 예수 팬은 제 발로 예수님을 찾아 왔지만, 두 번째 팬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먼저 손을 내미셨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나로 먼저”라는 변명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뒤로 미루었고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 당장은 따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단지 조금만 뒤로 미룰 뿐이다라는 꽤 이치에 맞는 변명으로 예수님을 따를 것을 미루며, 팬들은 그들의 미지근한 신앙을 정당화시킨다. 팬들에게 언제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를 거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모두 “내일”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장은 유효기간이 있으며, 그 기간은 바로 ‘오늘’ 즉 ‘곧(마4:18-20)’이다. 성령의 사전에 내일이란 없다. 예수님이 따라 오라고 하실 때에는 당장 따라오라는 말씀이다. 내일이 아닌 오늘이다.


내 지인 중에 나보다 열살 가량 많은 스콧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고교 시절 하나님과 진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확신을 느꼈지만 내일로 미루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자 하나님은 다시 한번 그를 헌신된 제자로 부르셨다. 그는 또다시 직장에 들어가서…결혼을 하고 나서…결혼을 해서 자녀를 여러 명 낳고 자녀가 어릴 적 부인이 교회에 나가자고 했지만 그는 그때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25년이 넘도록 그는 예수님 앞에서 “내일”이란 변명으로 일관했다. 다행히 최근에 그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디 스콧뿐이겠는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를 날을 ‘내일’로 미루고 있다. 결국 그의 ‘내일’이 와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는 내일의 땅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 버렸는지 모른다. 아내는 자녀를 데리고 떠나갔고, 이제 그는 격주로 주말에만 자녀를 만날 수 있다. 주중에는 알코올 중독자 재활 모임에서 중독과 사투를 벌였다. 내일의 땅은 이혼과 중독, 산더미 같은 빚이 있는 곳이다.


팬들은 내일만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내일은 비극이 닥치고 꿈이 깨진 뒤에야 비로소 오늘이 된다. 팬들은 수년간 미루기만 하다가 궁지에 몰려서야 다급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달려간다. 그제야 수천 조각으로 깨진 인생이나마 예수님께 의탁한다. 예수님은 속삭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내일의 땅에서 하나라도 더 잃기 전에 구해내기 위해 “나를 따르라”고 힘껏 외치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제 멋대로 가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 물론 하나님이 그런 일을 일으키시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신호를 보내며 경고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당장 따르지 않고 내일로 미루면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손해는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잃는 것들이 아니다. 최악의 상황은 따로 있다. 그것은 내일이 끝까지 오지 않는 상황이다. 사실, 뒤로 미룰수록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미룰수록 그분의 부르심에 점점 신경이 덜 쓰이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오늘 내리는 선택을 내일도 똑같이 내린다. 따라서 지금 하지 않는 것을 내일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때는 지금이다. 오늘이어야 한다. 내일 남모를 죄를 고백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내일부터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고 말하지 말라. 내일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내일 선교 여행이나 성경 공부, 양로원과 고아원 자원 봉사에 지원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오늘이 바로 시작해야 할 날이다.


Chapter 14 (나는 ‘무엇이든지’ 드린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드리지 않는 것이다

누가복음 9장에 제자가 되고픈 또 다른 팬이 등장한다. 이 팬도 역시 예수님께 전부를 바칠 준비가 되어 보인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하락하소서”(눅9:61). 이 팬도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말한다. 먼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자 한다. 그 때 예수님은 밭을 가는데 집중하지 않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의 비유를 드신다(62절). 이 남자의 요구는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의 최우선 사항은 아닐 뿐이다. 하지만 전부를 내려놓고 따르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따르는 게 아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를 생각은 없다. 전부를 걸 마음까지는 없다. 예수님 말고도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그래서 자꾸만 그것을 돌아본다. 팬들은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있지만 그분과의 관계에만 얽매일 생각까지는 없다. 묵은 관계들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을 인생의 최우선 사항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우선 사항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을 누구와도 나누길 원치 않으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과 온전한 헌신 뿐이다. 예수님이 전부를 요구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가장 포기하지 못하는 그 한 가지가 그분의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가지만 빼고 나머지를 전부 그분께 드린다 해도 그 한 가지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앞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 가면서 뒤에 있는 뭔가를 돌아보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이다. 그 한 가지를 포기할 때 마침내 오랫동안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만족이 찾아온다. 세상적인 것을 너무 소중히 여기면 그것이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따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현상을 “잘못된 사랑”(disordered loves)이라 명명했다. 우리 주변의 것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도에서 지나치면 문제다.


팬이 아닌 제자가 되면 당신 인생의 장면들이 어떻게 달라질까?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르면 어떤 인생이 펼쳐질까? 변명 따위는 없이, 어디서나,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흔히 내놓는 변명은 먼저 뒤죽박죽이 된 삶을 정돈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따라오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은 내일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하신다. 내일이 되어도 삶이 제자리를 잡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우리가 오늘 당장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우리를 현재의 실타래에서 이끌어 내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재 위치에서 당장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출발지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혼자 힘으로 목적지 가까이로 갈 필요도 없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의 손을 뻗어 따라오라고 부르신다. 있는 모습 그대로 따라오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에필로그 : 내 마음 속의 윌리엄 보든의 세 문장

고교 시절 윌리엄 보든의 전기를 읽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주님을 섬겼다. 그는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제자’로 기억될 것이다. 1800년대 말 낙농회사의 상속자로 태어나 억만장자였던 그는 예일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수백만 달러를 버린 채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머나먼 이슬람교도의 땅으로 떠났다.


“남김 없이”

윌리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여행을 권했다. 그리하여 유럽과 아시아, 중동을 여행하던 중 그는 복음이 닿지 않는 곳으로 찾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선교에 삶을 바치겠다는 편지를 부모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성경 책에 문장 하나를 썼다.

“남김 없이”

윌리엄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온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예일대학에 들어간 그는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고 한 친구와 함께 아침마다 성경을 일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눈만 뜨면 예일대학 내에 성경읽기와 기도 모임이 하나씩 생겨났다. 그가 4학년이 되자 그럼 모임이 1,000개에 달했다. 당시 그는 일기장에 “늘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리라”라고 썼다.


“후퇴 없이”

또한 대학 시절 그는 뉴헤이븐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을 돕기 시작했고, 알코올 중독을 비롯한 중독자들의 갱생을 돕는 예일 호프 미션이란 단체도 세웠다. 그는 재학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았다. 졸업 후 그는 성경 책의 뒷 면에 다시 한 문장을 썼다.

“후퇴 없이”

그는 세계 선교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중국 간쑤성에 복음을 전하가로 마음을 먹고, 중국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랍어를 배우고 이슬람 지역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이집트로 건너 갔으나 그곳에서 척수막염에 걸려 스물 다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카이로에 묻혔다.


“후회 없이”

예일 대학의 영적 부흥을 일으키고 수 많은 사람을 전도했던 그는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 기억될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성경 책 속에서 세 개의 문장이 발견되었다.

남김 없이(No Reserves).

후퇴 없이(No Retreats).

후회 없이(No Regr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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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Who's Who ? 김 용찬, 장 은애 집사(1부, 신앙생활) file Thankyou 2014.04.14 1255
38 어린 나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다 file 웹지기 2014.04.12 851
37 나를 위한 기도 (오광수) 웹지기 2014.03.15 720
36 브라질갱들이 한인교회 돕는 이유는? 내려놓음 2014.03.06 1223
35 중요한 소리(신 경규, 조 영진 선교사님 Kakao Story에서) Thankyou 2014.01.24 1218
34 구멍나지 않은 복음 [1] file 김순혜 2013.12.14 1026
33 첫눈 (이해인) file 웹지기 2013.12.12 1240
32 니카라구아 단기선교 6명의 독수리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1] Thankyou 2013.10.11 1293
31 한국교회, 달리는 열차에서 내려라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내려놓음 2013.10.02 2839
30 KOSTA를 다녀와서 [1] file 김순혜 2013.07.29 1751
29 여름 일기 file 웹지기 2013.07.24 1376
28 6월을 시작하며 file 웹지기 2013.06.08 2248
27 작은 victories Thankyou 2013.06.06 1459
26 사순절의 기도--이해인 file 웹지기 2013.02.26 2892
25 오이비누 Thankyou 2013.02.22 2717
24 "카톡"세상에서 Thankyou 2013.01.10 2370
23 제직 수련회 Thankyou 2013.01.07 2428
22 베리칩 소동 file 웹지기 2013.01.02 3268
21 할아버지의 두번째 약속 [1] 요기아빠 2012.09.07 3041
20 Who's who? (네번째 이야기) file 윤서아빠 2012.04.06 3156
19 Who's who? 2번째 이야기 (관리부장 : 남경민 집사님) file 윤서아빠 2012.02.19 3307
18 Who's Who? (첫번째 이야기-전인기 선생님) [3] file 윤서아빠 2012.02.05 3539
17 새해 소원 웹지기 2011.12.30 3047
16 꽃을 보려면 웹지기 2011.09.15 3181
15 바닷가에서 웹지기 2011.08.30 3350
14 흔들리며 피는 꽃 웹지기 2011.08.30 3597
13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웹지기 2011.08.17 4597
12 제사와 추도예배 웹지기 2011.06.10 5468
11 5월21일이 종말인가?(뉴스엔조이에서 전제) 웹지기 2011.05.10 5047
10 일본을 위해 울라! 웹지기 2011.03.18 5162
9 수요통독 질문 웹지기 2011.03.03 6224
8 울지마 톤즈 [1] 웹지기 2011.02.26 5643
7 달아나세요! 웹지기 2011.02.25 5227
6 무엇을 위해 살까? [1] 웹지기 2011.02.22 5452
5 이단 비판 3: 안식교 웹지기 2011.02.16 5642
4 이단 비판 2: 구원파 웹지기 2011.01.23 5657
3 이단 비판 1: 여호와의 증인 웹지기 2010.12.30 6145
2 땅밟기 신학 비판 (김세윤 박사) [2] file 웹지기 2010.11.11 6674
1 니카라과의 아침 file 웹지기 2010.04.19 6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