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콜럼비아 제일장로교회

성경대학 자료실

나대던 에브라임 입다에겐 안통해

웹지기 2014.02.26 22:18 조회 수 : 5044

성경대학 <구약이야기>에서 이정심 집사님의 질문: 입다와 에브라임 사람들은 왜?


이야기의 개요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따졌다. 2)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3) 입다는 나와 내 백성이 암몬과 싸울 때, 우리가 너희를 불렀으되 그 때는 너희가 돕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도와 주심으로 그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셔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와서 싸우고자 하니 말이 되는가?

4) 입다가 길르앗 사람들을 다 모아서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이 에브라임을 무찔렀다. 에브라임은 길르앗 사람들을 에브라임과 므낫세 출신 중에서 도망한 자들이라고 여겼다. 길르앗은 요단강 나루턱에 자리를 잡아 <쉽볼렛>이란 발음을 시켜서 <십볼렛> 하면 에브라임 사람인 줄로 알고 죽였다. 이 때 에브라임의 죽은 자가 42,000명이었다.

 

입다와 에브라임 지파간의 전쟁 이야기는 사사시대의 축이 꺽인 지점(아비멜렉 이후)에 벌어집니다. 가나안 부족과 싸우는 대신 오히려 내부적인 갈등으로 언약공동체 안에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입다에게 에브라임 지파가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는가?’ 하며 시비를 걸어오자, 입다는 기드온처럼 온화하게 받아주질 않습니다. 왜냐면 에브라임이 필요한 때에는 도움을 요청해도 무시하더니, 승리하고 나니까 트집을 잡고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동안 에브라임이 길르앗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 반감으로 화가 난 입다가 길르앗 백성들과 함께 에브라임과 전쟁을 벌여 무참히 살륙합니다. 패해 달아날 때 요단 나루에서 <쉽볼렛> <십볼렛>으로 발음하면 에브라임 지파로 분류해 죽였는데, 길르앗 출신을 들먹이며 무시했던 에브라임이 오히려 자신들 출신 때문에 죽임당한 아이러니입니다.


에브라임이 사사의 역할에 간섭하는 모습이 두번 등장합니다. 한번은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기드온을 협박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높이는 말로 위로하자 으쓱해서 돌아갔습니다. 두번째 사건이 입다의 경우입니다. 비슷한 패턴인데 입다의 대응은 기드온과 달랐습니다. 입다는 에브라임의 억지를 용납치 않고 오히려 그들을 응징함으로 그들의 교만을 꺽어버립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스스로를 으뜸으로 여기며 위세를 떨었던 것입니다. 다른 지파 일에 간섭할 뿐 아니라, 어떤 승리든 자신들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들었고, 안 그러면 트집을 잡았던 것입니다. 요셉의 두 아들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인데 이스라엘(야곱)이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서 축복합니다. 기드온과 입다 모두 므낫세 지파 출신입니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인정은 받으려는 에브라임의 작태가 심판받은 측면이 있지만, 외적을 응징하고 내부에 샬롬(평화)를 가져와야 할 사사가 도리어 내부의 동족을 응징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이상한 모습입니다. 아비멜렉 이후 사사들이 다 그런 모습입니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희생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영광을 차지할 순간에는 자신이 모두 독차지 해야 만족하는 것이 에브라임이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에게 실망하는 이유가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른으로서의 대접과 성과는 다 챙기려고 하면서, 자신은 전혀 희생하지 않는 모습에 아랫사람들은 염증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그렇지 않은지, 나는 말로만 사역와 섬김을 하고 있지는 않나 돌아보게 됩니다.


입다 뒤이어 나온 소사사들은 부유함을 자랑하고 율법과 무관한 삶을 삽니다. 입산의 경우는 많은 자식과 더불어 그 많은 자식을 위해 며느리와 사위를 모두 밖에서 데려 오는 이스라엘 평민만도 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압돈이 많은 자식과 더불어 나귀 70을 탔다는 것은 사사의 부유함과 권력이 얼마나 비대한지를 보여줍니다. 사사는 구원자인데 구원은 커녕, 사사직을 이용해 그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만 보일 뿐입니다. 엘론은 아무 행적도 없습니다. 누구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했는지 알 수 없고 그저 출신과 어느 때 사사였고 어디서 죽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한 사사, 부와 권력을 누렸다는 것만 기록된 사사, 아무 행적도 없는 사사... 사사 본연의 역할에서 점점 멀어지고,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존재로 오히려 악을 조장하는 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사를 차저하는 사람들, 심령의 속박을 받은 영혼들을 구원하겠다고 목사된 사람들 모습이 사사 말기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나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목사, 권력과 부에만 관심을 가진 목사, 어디서 살다 죽었다고 밖에는 기록할 게 없는 목사... 나는 어떤 목사로 기록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