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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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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라는
평을 받은 노아요
방주로 구원받은 노아였다.
그러나 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요 죄인인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축복의 소산으로 허락하신 포도주를 먹고 흠뻑 취하여
부끄러운 상태에 놓인 노아.
모든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노아에게서 본다.
다만 그 상황을 보고 가십으로 삼은 함과 같이 되지 말고
덮어주되 철저히 덮어준 셈과 야벳과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메세지로 받는디.
인간 누구도 예외없이 죄인인 것을 잊지 말고
정죄가 아니라 덮어줌의 사랑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자녀된 자의 본분이요 자리인 것이다.
암튼
아프고 약한 곳을 알아
함께 아파하고 고쳐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일이겠는가
그런데
온전하게 함께 아파하고 위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그저 보통 사람들은
남의 아프고 부끄러운 곳을 보면서
내가 아닌 것이 다행이고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비교대상정도에 그친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과소평가인 것일까?
게다가 현대는
정보의 시대
무엇이든 호기심대로 다 파헤치는 이 시대
파파라치가 직업이 된 시대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부끄러운 곳
누군가의 약한 곳을 가려주기 보다는
드러내어 즐기는 시대가 되었고
아무 감각없이 그 시류에 젖어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나를 돌아다 본다.
나는 덮어주는 인간이었던가?
아니 덮어는 주되 살짝만 덮어주는 인간은 아니었던가?
건설적인 비판은 필요하잖아....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누군가의 부족을 도마위의 생선으로 삼은 적은 없었던가?
아니
그냥 덮으면 썩어. 도려내야지. 다음을 위해...
그러면서 은근히 나의 의를 드러낸 적은 없었던가?
아니
귀찮아, 관여하기 싫어.
그냥 덮자 하며 덮었던 적은 없었던가?
암튼
셈과 야벳의 덮어줌이 시사하는 의미가 이리도 여러 각도에서 내 맘을 찌르는 이유는
아마 이러 저러한 이유로 내가 그동안 완전하게 덮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살아가기 전까진
우리 인간 그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스스로 고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부족한, 연약한 인간들은
서로 덮으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고치실때까지
우린 그저 참고 기다리며
덮어야 함을 잊지 말자.
덮되 홑이불을 들고 뒷걸음쳐 들어가
얼굴을 돌리키지 않고 아비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않은 셈과 야벳처럼
철저하게 덮어야 하리라.
내 아이들이 잠잘 때 감기들까 추울까 걱정하며
차낸 이불을 또 덮어주고 차내면 또 덮어주고 하던 바로 그 맘으로
그렇게
내 이웃의 부끄러운 곳을 덮어주고 또 덮어주고 하자.
그렇게 살다보면 예수님 오시리라.